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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린 일기


그녀에게서 풀 냄새가 난다.
애린  2005-06-15 15:36:19, 조회 : 5,447, 추천 : 1074





      “인생은 정리하면서 사는 건가 봐요. 마음도 그렇고, 집안도 그렇고…”

      오늘아침 이웃아낙이 했던 말이다. 그 동안 청소를 해주던 아줌마가 고향엘 가는 바람에 요 며칠 그녀는 무척 바쁘다.

      이곳에 사는 한국주부들은 대부분 가정부를 쓰거나 시간제 파출부를 쓴다. 싼 임금 덕에 우리나라 돈 4만원 정도면 한달 내내 집안 청소에서 해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루 걸러 야근을 하는 남편들보기 미안해서 집안일은 내 스스로 하는 아낙도 많다.

      시간제 파출부를 쓰는 그녀는 아이들이 셋씩이나 된다. 더구나 그녀는 틈틈이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그도 모자라 애들 유치원 비를 절감하기 위해 일주일에 두 번씩 유치원에 나가 한글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틈만 나면 무엇이든 배우느라 그야말로 그녀에게 할당된 시간은 금 쪽 같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며칠 전, 우리는 걸어서 가까운 시장엘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 새벽부터 내리던 비가 좀처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 거였다. 일층 로비까지 내려왔던 우리는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무작정 빗길을 걷게 되었다.

      이윽고 양철담장옆길에 이르자 나는 이 길을 지날 때마다 양철 담에 올라 하얗게 핀 꽃을 찍어보고 싶었노라고 했다. 그 말에 웃고만 있던 그녀는 지난날 남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둘 째 아이 생일 날 외식을 하기 위해 문밖에서 아이들과 남편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금방 나온다던 남편이 한참을 기다려도 함흥차사 더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집안으로 들어가보니 서쪽으로 난 베란다에서 그 큰 남자가 노을을 찍느라 부산하더라고...  순간,그 많은 식구가 영문도 모르고 마냥 기다렸다는 것에 화가 났지만, 한편 내가 생각나 그 마음이 이해가 되었단다.



      빗길을 걸으며 그런 저런 이야길 하다보니 어느새 우리는 시장이 아닌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빗방울을 가득담고 길섶에 피어있던 연 보라 풀 꽃에 반해 한참을 서성이기도 했고, 그럴 때면 나는 가져오지 못한 카메라 생각이 간절하다고 했다.

      이윽고 돌아오는 길목에서였다. 어지럽게 쌓여있던 논 슨 철골들 사이로 삐쭉 나와있던 하늘빛 달개비꽃,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보니, 이 꽃은 자기가 지키고 있을 테니 어서 빨리 카메라를 들고 나오라며 그녀는 나에게 심각하게 재촉하는 거였다. 그 순간 우리는 굴러가는 낙엽만 보아도 웃음이 난다는 사춘기 소녀가 되었나 보다.  터져 나오는 웃음보를 한참 만에 진정시키고서야 카메라를 들고 다시 나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아까운 시간을 많이 뺏어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늘 다람쥐 체 바퀴 돌 듯 바쁘게 사는 일상, 모처럼 여유로운 하루를 얻어 외려 좋은 시간 이었다고 대답하던 그녀였다.그리고 며칠 후 우리는 한적한 공원의 소풍을 즐기며 그 곳의 초록만큼 싱그럽운 추억을 담았었다.



      어느 날인가 그녀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부가 어떻게 해서 결혼하게 되었는지 무척 궁금해 한다고 했다. 남편은 키가 큰데다가 핸섬하지, 게다가 착하지 똑똑하지. 그런데 자기는 작은 키에 못생겼지. 어리벙벙하게 보이지. 그러기 때문에 자꾸 그런 말을 듣는 것 같단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지내는 날이 오래일 수록 남편이 더 반했을 것 같다고… 작은 것에 감동하고,소박하고, 자신의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금방 자신을 돌아볼 줄 알고…그래서 돌아서면 또 다시 보고 싶은 마음, 그녀의 마음에서 향긋한 풀 냄새가 난다고….

      그런 그녀가 불현듯 사는 것은 정리인가보다고, 버릴 것을 버리고 정리하고 사는 것이 인생인가 보다고... 그런 얘길 해서 내 마음을 철렁 내려 앉게 했다. 그럴 것이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정리해야 할 집안 산림 걱정이 태산 같다며, 그럴 날이 어쩌면 머지 않는 날일지도 모르겠다며 며칠전에 했던 그녀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이들 귀가 시간이 임박해서 바쁘게 돌아와야 했던 지난 소풍이 그녀는 못내 아쉬웠나 보다. 이번 주에 다시 한번 소풍을 가잖다. 이번에는 눈부신 꽃 밭에서 날개 짓 하던 색색의 나비를 찍어보고 싶다고…




루시아
작년 어머님 돌아가시고 유품정리 할때가 생각이 나네요..
한사람이 살아있기 위해 가져야할 것이 얼마만큼인가..생각하게요
늘 비우고 비웠다고 생각한것보다 더 많이 비워야
겨우 조금 숨이 트일 정도라는 걸 알면서도 그게 안되요
서울은 지금 장마 시작입니다. 건강 챙기세요
2005-06-27
21:14:17



애린
그렇지요. 저도 이곳으로 떠나올 땐 그냥 여행자처럼
최소한으로 짐으로 살겠다고 마음 먹었더랬습니다.
돌아보니 그래도 부족한 게 보이네요.
살아 갈수록 비운다는 게 쉽지가 않다는 것과
그래도 비워야만 내 행복의 공간이 확보되는 줄을
점점 알게 되는군요.

할머니가 가벼워 지는 것은 그 하늘을 오르기 위해서라는
어느 동화가 생각납니다.

여기는 쨍 하고 해가 떴습니다.
루시아님도 건강하세요.감사합니다.
2005-06-28
09:57:49

 


안개
비워내야만 또 다른 무엇을 채울수 있답니다
나를 버리지 못하면 채울것도 없지요
그러나 그것이 어렵네요.

두여인이 살아가는 진솔한 삶이 아름다워요
사진도, 음악도 잔잔한 휴식이 되었네요.
2005-07-19
00:5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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